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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그녀의 진실, 마리 앙투아네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은영마마 작성일17-09-12 17:55 조회239회 댓글0건

본문

 



역사 속의 그녀의 진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6명의 아이 중

"마리 앙투아네트" 로 불리는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이 태어납니다.

이름이 참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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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16명의 자식이 있는데,

앙투아네트는 그 16명의 자식 중

15번째 아이인데, 딸로는 막내딸입니다.

당시 테레지아 여제는,

자식을 가지고 장사를 했던 여자 입니다.

모든 자식을 다 자기가 필요한 동네에

생선 팔듯이 내다 팔았죠.

비유가 그런가요?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딸인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안나는,

절름발이에 등이 굽어서 정략결혼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테레지아는

둘째 딸인 마리아 안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 딸을 살뜰하게 거둬서 키운 건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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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때 마리 앙투아네트 



당시 앙투아네트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로 오스트리아를 위해

팔려갈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도 앙투아네트의 교육에

그렇게 힘을 쓰지 않았죠

왜냐면 불쌍하게도 다른 자식들은

볼 수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보는데

프랑스로 시집가는 앙투아네트는

다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유분방하게 자라게 했고,

그대신 프랑스 춤을 배우게 했다고 하네요.

아.. 성격은 착하기가 이를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1762년에는

비엔나 궁전 음악회에 온

6살이된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다정하게 일으켜주고

모차르트에게 청혼도 받았다고 하네요...

여튼, 프랑스의 루이 오거스트와 약혼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가 강대국으로 부흥하고있는

프로이센(독일 북부쪽 신국가)을 견제하기위해서

프로이센에게 위협받은 오스트리아의 공주를

루이 오거스트와 정략결혼시키기로 했는데,

그 공주가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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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앙투아네트와 루이 오거스트가결혼하는 장면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실지도 모르는데

당시 프랑스 궁정의 첫날밤은

진짜 매우 수치스럽기가 이를 곳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루이 오거스트에게 직접 잠옷을 입혀주고,

왕실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공주(공작 부인)이

앙투아네트에게 옷을 입혀주면

신랑과 신부가 침대 위로 올라가서

첫날밤을 치루기 시작하고

커튼 사이로 훔쳐보는 사람도 있고,

절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아 물론 왕족의 결혼이니

사람들이 더욱 궁금해 하는 게 심해서

훔쳐보는 일이 빈번하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순수 부르봉 혈통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앙투아네트는 함스부르크 왕가라

부르봉 혈통 주의자들은

두사람의 결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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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당시 프랑스 사회는

루이 15세의 방탕한 생활과,

베르사유의 건설로 인해

제정이 많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정치는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루이 15세에게 계속해서 애첩들을 붙여줬는데,

그 애첩 중 한 명이 유명한 뒤바리 백작부인입니다.

계속해서 애첩을 붙여준바람에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뚜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왕실은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는 상태고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새로운 황태자비(마리 앙투아네트) 

대한 기대감이 매우 높아져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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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오거스트의

부부사이는 아주 좋았는데,

중요한 잠자리는

루이 오거스트가 성적인 문제가 있어서

결혼 초에는 계속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 앙투아네트가 의지했던 건 뭐...

영화나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사치" 라고들 하는데

당시 앙투아네트가 쓰던 돈은

"앙투아네트, 루이 16세"

두명의 돈을 다 합해도

당시 프랑스 왕가의 예산중

가장 적은 예산이었다고 합니다.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루이 오거스트)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프랑스의 재정이 완전 바닥을 들어내고 말아버립니다.

그리고 당시 앙투아네트의 모든것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개방화되어있었습니다.

옷 갈아입는 거, 머리 손질, 화장 등등...

모든 게 다 공개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모든 게 다 앙투아네트에게는

안좋은 소문으로 변질되어

'적자부인'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죠.

그런데, 당시 왕비가 없고 왕실의 여주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였는데,

당시 앙투아네트는 비싼 재질의 옷보단

덜 비싼 재질의 옷감으로

옷을 많이 해서 입었는데,

그 덜 비싼 재질의 옷감도

앙투아네트가 입었다면

가격이 저절로 상승해 버렸죠

결국, 사치는 앙투아네트가 한 게 아니라

앙투아네트의 패션을 따라잡기 위해

혈안이된 부인들의 사재기 현상

모든 물가를 올리게 한 주범이 됩니다.

앙투아네트는 돈을 정작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돈을 제일 많이 쓴 사람은

뒤바리 백작 부인과,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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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화려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



당시 뒤바리 백작 부인이 그저 차를 타 먹기 위해 

구입한 티 세트는 수천만 원을 호가했고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레이스가 레이스를 낳는

로코코 디자인이 유행이었습니다.

로코코 옷은... 그저 그냥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비싼 옷입니다.

프랑스 재정이 바닥이 들어난건

이 로코코 문화 때문입니다.


1774년 드디어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하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즉위합니다.

루이 16세는 왕이 되자마자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위해 지은

'프티 트리아농'을 앙투아네트에게 줬는데,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에서

가장 좋아한 곳이 '르 아모의 농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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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아네트가 가장 사랑한 집 '르 아모의 농가'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곳에서 나온 농사물로

간단하게 음식을 해 먹었다고 합니다.

가끔 이곳에서 연극도 하고,

왕을 즐겁게 해줬다고 합니다.

1778년 첫 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습니다.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가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하면,


그것이 너에게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라 했고,


하류계층이 사는 곳을 방문해


가난한 노동자들이 먹는 음식,

생활을 경험하게 했고


농부의 자식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 에게


네가 가진 좋은 것들을 나누어 주라며 말을 했고,


마리 테레즈가 혹여나 선물을 사달라고 하면


앙투아네트는 너에게 선물을 사줄 돈으로

그들을 도와야 해서 선물 살 돈이 없다. 라며


딸에게 '검소함'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앙투아네트를 똥물로 빠트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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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당시 이 목걸이의 첫 주인은

'뒤바리 백작 부인' 이었습니다.

루이 15세가 애첩인 백작 부인에게 주기 위해

특별 제작한 목걸이였는데,

루이 15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 목걸이를 제작한 세공사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세공사는 자신들이 망하기 싫었는지,

다시 왕가에 빌붙어 루이 16세에게

이 목걸이를 보여주며

구매를 해달라고 제의하게 됩니다.

루이 16세는 당시

첫 딸을 출산한 앙투아네트에게

딱 어울릴만한 목걸이라며

앙투아네트에게 선물했는데

앙투아네트는

"이 목걸이를 살 돈으로 군함을 축조하는 게 옳다" 라며

목걸이를 거절하고,

루이 16세 역시 목걸이를 돌려보냅니다.

세공사는 이런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비의 친구인 모트 부인은

가짜 왕비를 만들었는데

당시 앙투아네트에게

총애를 잃은 추기경을 이용해

추기경을 대리인으로 세우고,

가짜 왕비를 진짜처럼 위조 한 후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라보며,

너무 아름답다. 라고 말했고

추기경은 가짜 왕비에게 속아

다이아몬드를 구매한 후

왕비의 친구인 모트 부인에게 넘기며

"왕비에게 전해주라"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트 부인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자 마자

여러갈래로 해체해서 팔건 팔고,

남길건 남겨서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보태버립니다.

그런데 추기경은 당시 돈도 없으면서

다이아몬드를 사서 모트 부인에게 안겨줬으니,

세공사에서는 돈을 달라고 독촉하기 시작했고,

추기경은 사면초가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세공사는 추기경에게 돈을 받기 힘드니

앙투아네트에게 직접 찾아가

목걸이 값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왕실 재판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모트 부인은 왕비를 배신했고,

백성들은 앙투아네트에 대한 실망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때부터 앙투아네트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합니다.

왕비는 매춘부다.

왕비의 출신은 공주가 아니라 창녀다.

왕비가 목걸이를 받고 추기경에게 몸을 팔았다.

그것도 모자라 왕비가 쓴것처럼

허위로 제작된 거짓 자서전까지 나돌기 시작했고,

왕실에대한 배신감에 극에 다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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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테레즈,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샤를(훗날 루이 17세) 



보석으로 파문을 일으킨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5년 루이 샤를을 낳았고,

보석 파문도 이제는 시들시들해져

잊혀져가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은 힘든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당시 미국의 독립에 대한 투자가

영국과 대결하는 구도 형식이었는데,

영국에게 지기 싫었던 프랑스는

영국보다 더 많은 돈을 미국에 보냈고,

결국 재정이 파탄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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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사전작업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루이 16세는 혁명군에게 둘러싸여

불안에 떨었지만, 프랑스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당장에 아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떠날 준비를 하고,

오스트리아로 떠나던 중

너무 식구가 많아서 그런지

결국, 혁명군에 의해 붙잡혔습니다.

루이 16세가 혁명에 반대 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혁명군은 오히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가게 되면,

혁명에 참가한 모든 백성들은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유언비어를 퍼트렸습니다.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그리고 가족들은 '탕 풀 탑'에

강제로 유폐되어버립니다.

루이 16세는 앙투아네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계속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계속 잡혔고

결국 1793년 1월 21일 혁명재판으로 인해

루이 16세는 사형을 선고받고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샤를은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탕 풀 탑'에 유폐 되어

모진 고문과, 학대, 구타를 당했고,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재판을 받습니다.

앙투아네트의 최고의 죄는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 라는 것 밖에 없었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는

창녀만도 못한 더러운 왕족이라는

죄 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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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참수 당일, 앙투아네트는

인분을 담아 움직이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에 도착했는데,

단두대에 올라가던 중,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았을때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대부분, 단두대 처형이라면

얼굴이 바닥을 향하게 눕는 게 보통인데,

앙투아네트의 경우

일부러 공포심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칼날이 떨어지는 장면을 직접 보게 하기위해

얼굴을 칼날을 보며 눕게 했다고 합니다.


앙투아네트의가장 큰 허점으로 보였던

사치와 향락은 당시 프랑스 역대 재정 중

가장 적은 부분을 차지했고,

앙투아네트의 목걸이로 유명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빙자한

모트 부인의 사기였으며,

앙투아네트의 명언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은

"빵이 없다면, 과자(브리오 슈)를 주세요" 였다고 합니다.

과자(브리오 슈) 는,

오스트리아에서 평민계층이 먹었던

밀가루로 만든 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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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군과 마주친 왕실 가족



혁명군은 왕실가족을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기 시작했고,

그 폄하 속에 앙투아네트의 모든걸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르 아모 농가에서 농사를 지었다.'라는


이야기는 빼트린채


'프티 트리아농에서 수십 명의 남자에게
몸을 바치며 창녀와 다름없었다.' 라는


유언비어만 넘치게 흘러 내보냈다.



역대 프랑스 왕비들 중

가장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사랑했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런 오명을 받은 채, 지금도 역사에서는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아네트의 사치로 인한
프랑스의 재정 파탄이 원인이 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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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 30분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받았어요.

당신의 오빠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는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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